나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살고 있지만 외가쪽은 항상 삼촌들 따뜻한 마음이 전해진다.
친가쪽은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이 항상 엄하게 대하여 주었고,
특히 아버지와 큰삼촌은 어렸을적 공포의 대상이었다.
화나면 손에 잡히는대로 채찍질을 했고 잘못을 저지르면 스스로 저녁에 집 안에 갈 수가 없었다.
제일 가슴 아픈 기억에 남는 것은 여름 오후에 소 먹이러 들판으로 끌고 가서 풀을
뜯겨야 하는데 일단 동네 아이들 모두 모여 소를 냇가 퇴약 볕에 매 두고,
냇물에서 멱감는게 절차였다.
그리고 나서 3 시 쯤부터 풀 밭에 끌고 가서 풀을 뜯기는데, 어느 날 아버지가
그 광경을 보고 불러내어 소 고삐로 내 등어리를 내리치니 등 뒤에 뱀처럼 자국이 생겼다.
그런 식으로 우리를 키웠다. 잘못되었으면 아이들 수준에서 알아듣도록
교육을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나는 큰아들 결혼하고 나서 아이들 낳으면 절대 매질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너무 폭력으로 키우면 아이들이 어른들 눈치 보기에 급급하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런 친가쪽에 비해 외가쪽은 매우 자상한 편이었다.
특히 요즘 살기가 퍽퍽한 큰 외삼촌께서 77년도에 내가 사회에서 무척 방황할 때였는데
운전을 배우기 위해 한 시간 연습하는데 일만원이라 해서 순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사정 얘기를 했더니 서슴없이 지갑에서 일 만원을 주셨다.
정말 백척간두에 선 위기의 시간들이었는데 얼마나 고맙던지...
당시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에 실패하여 어른들이 무서워
집에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혼자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데 모든게 되는 일이 없었다.
군대라도 가려 했지만 나이가 실제보다 3년 늦게되어 군대도 못가고 자원 입대를 하려했으나
어렸을 때 왼쪽 귀에 중이염이 있어 농이 나오고 고막이 파열된 상태라서 불합격을 받았다.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였는데, 그 해 10월 29일에 면허증을 발급 받아 운전을 하면서
조금의 돈이라도 벌어서 사회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돈을 벌기 시작하여 아버지에게 장날 몇 번의 국밥을 사드렸던게 기억남는다.
큰 외삼촌께서 사업을 하다가 완전 폭삭 망하였는데 그래도 지금처럼 어렵게 사는 줄 모르고,
지난 번에 20만원을 보내드린게 다행이었다.
그리고 지난 주 금요일(6일)에 외삼촌 아들 1톤 차와 내 차에 여기 있는 나무를 몽땅 싣고
순천 승주읍으로 달려갔다.
고구마를 캐야하는데 비닐을 안씌우고 심었더니 도저히 호미가 들어가지 않는다하여
미리 농업기술센터에서 굴삭기를 빌려놔라 해 놓고 간 것이다.
다음 날 장난감 같은 굴삭기를 가지고 내가 땅을 뒤적이면 나머지 4명이 골라서 담아 모두 캤다.
외삼촌 내외가 얼마나 좋아하신지 모른다.
다음 날 뒷 동네 산에 가서 100 여 상자 곶감용 감을 땄고 내 집으로 오려했으나 큰아들도
월요일 출근해야 한다며 가버리고 나도 떠날 수가 없어서 하룻밤 더 자고 다음날 마저 24박스를 따고
짬을 내어 고속절단기로 내가 가져온 나무 각목을 화목 보일러에 넣기 좋게 잘라서 쟁겨놓고 왔다.
얼마나 고마워 하신지 78세 삼촌이 눈물겨워 하신다.
용돈을 좀 드리고 올려다 어제 점심 71000원을 내가 냈기에 조금 위안을 삼고 그냥 왔다.
사람이 늙어서 가난은 골병이다. 하물며 늙어 가난은 죄악이라 한다.
농촌 사람들은 그래서 모든걸 아껴서 팔아 돈을 만들어 살아간다.
젊은 시절 뼈아픈 방황과 고생을 했지만 지금 연금 280만원과 기타 150만원이 매월 수입원이니
정말 나는 행운아다. 더 욕심을 내어본들 마음의 병이 생긴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는게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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